아침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인 커뮤니티 ACC(Achim Community Center)에서는 모닝 오너의 아침과 일상을 건강하고 다채롭게 만들어 주는 프로그램이 진행됩니다. Morning Hurdling은 모닝 오너를 중심으로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작은 도전을 함께하는 활동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하면 좋다는 걸 알지만 선뜻 행동하기 어려운 일이 있어요. 그것들을 Morning Hurdling을 통해 모닝 오너들과 따로 또 같이, 하기 싫은 마음과 핑계를 허들 넘듯 폴짝폴짝 넘어가며 서로 응원하고 용기를 돋궈줍니다.
이 아티클은 첫번째 Morning Hurdling, ‘Monocle Translation’의 결과물로, <The Monocle Companion> 속 일부 컨텐츠를 모더레이터 희석 님과 모닝 오너 다섯 분이 함께 번역했습니다.
Article #42: The Future of Media : 미디어의 미래
많은 문화적 논의들이 비난과 모욕이라는 이름으로 점차 그 의미가 퇴색되고 변질되고 있기에, 지난 수년간 우리 사회가 성취해 왔던 많은 것들을 쉽게 잊고는 합니다. 그 말은 곧, 인간 고유의 ‘주장하는 능력’ 자체를 위협받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이런 분열은 없었다 싶을 정도로 사람들은 미국이 분열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들은 마치 미국이 내전 직전의 상황을 겪고 있는 것처럼 말하기도 하죠.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미국 내의 극단적 정치 상황이 바로, 우리 사회 구조를 위협하는 가장 큰 문제이자 중대한 이슈라고 말해왔어요. 그러나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사실 몇 세기동안 우리 의견을 양분해 왔던 중대한 몇몇 논쟁거리는 이미 대체로 어느 정도 마무리 되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소수자들도 동등한 권리를 갖는 것이 맞는 것일까요?”와 “우리의 실수투성이 역사를 아이들에게 가르쳐야만 할까요?”, 그리고 “사람들은 누구든 자신이 선택한 이와 자유롭게 결혼할 권리가 있나요?”나 “우리가 각자의 존엄성에 대한 권리를 공유하고 주장하며 살아야 하나요?”와 같은 질문에 다수가 ‘당연한 일이다’라고 동의합니다. 그렇게 대체로 역사는 옳은 쪽이 이겨왔고, 이는 정치적으로 특히 좌파 측에게 주로 일어났던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좌파는 어떻게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이러한 여론 혁명에서 승리를 쟁취해 올 수 있었을까요? 이에 대해서는 바로, 레거시 미디어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후 미국의 저널리즘은 미국 사회의 광범위한 영역을 다루고 이를 충족시키기 위한 다양한 보도를 실천하기 위해 출발하였습니다. 그 결과 대체로 평균적인 미국인보다도 더 진보주의적 사고를 실천해 왔던 대다수의 언론인들은 결국, 사람들을 저널리즘 속에 자연스럽게 유입시키는 일에 관여할 수밖에 없었죠. 뉴스와 신문을 판매하는 사업 모델은 결국 당의 이념과 정치관 같은 것을 뛰어넘어, 가능한 한 가장 많은 청자와 구독자를 확보하는 것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고, 그래서 당시의 진보주의자들은 청중과 독자들을 참여시키고 설득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동시에 그들은 자신에게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 혹은 심지어 정말로 비도덕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그냥 무시하거나 악마처럼 묘사할 수는 없었죠.
20세기 내내 저널리즘은 반대하는 이들에 대한 우려와 그로부터 비롯되는 불편함을 매듭지어야 했습니다. 그 결과 좀 더 관대한 미국이라는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고통스러울 정도로 느린 방법으로 미국 전역 신문 게시판, 논평 기사 그리고 방송 등을 택했고, 이를 통해 그러한 문제들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표면적으로는 성공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은 한때 급진적이고 좌파적인 견해로만 여겨졌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거의 찾아보기 어려울 거예요. 미국 건국 이래 만들어졌던 “모든 미국인의 평등을 보장한다”는 법과 가치에 모두가 동의하는 것처럼 말이죠. 이를 뒷받침해 주는 통계에 대해 살펴보자면, 1991년까지만 해도 (동부의 54%에 비해) 남부에서는 서로 다른 인종 간 결혼에 대한 찬성률이 33% 정도에 불과했죠. 그러나 오늘날 남쪽과 동쪽 사이에는 이러한 차이가 없습니다. 각각 93%와 94%의 찬성률을 확인할 수 있죠. 양극화에 대한 끝없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많은 경우 우리가 대체로 동의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물론, 여전히 논쟁은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대체로 “우리는 태아를 언제부터 생명으로 판단해야 하는지, 한 시민이 얼마나 많은 총기를 소유할 수 있는지, 정부가 우리의 세금을 무엇에, 어떤 문제에 사용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서는 대체로 의견이 갈리는 편이긴 합니다. 하지만 이런 것은 모두 건강한 민주주의체제 안에서 사회에 참여하여 주장하고 토론할 수 있는 종류의 논쟁임은 분명합니다. 이러한 ‘토론 그 자체’를 보장하는 것은 좌파 역시 지지하는 태도였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변화가 있었고, 현재 좌파는 더 이상 그러한 토론에 가치를 두지 않는 것처럼 보이곤 합니다. 미국의 여론이 ‘좌파의 도덕성’으로 눈길을 돌리며, 좌파는 계속 흔들리기 시작했고, 한때 지지했던 많은 입장과 가치를 포기하고 있죠.
오늘날 우리는 20세기 내내 대중 매체를 통해 상호 간 관대한 합의의 과정을 마련하고, 또 대중들을 부드럽게 설득하는 과정이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과거 좌파진영이 열심히 설파했던 ‘관용’이라는 가치가 어느새 반대 의견을 바라보는 더 확고한 편협함 같은 태도로 대체되어 버렸죠. 오늘날 좌파는 그들이 한때 싸웠던 것의 많은 부분 -특히, 민주주의, 토론과 합의, 조율 등의 가치- 에 대해 점차 혐오적이고 편협한 태도로 바뀌었습니다.
미디어는 이런 상황에서 다시 한번, 중대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죠. 광고와 유통을 통해 돈을 벌었던 과거 인쇄 매체와는 달리 디지털 미디어는 참여와 구독으로 기능하며, 미국 정치 중산층의 광범위한 의견을 담아내고 이를 포용하는 것 대신 극단적인 방향으로 여론을 이끌어내 이를 바탕으로 수익구조를 만들고 운영되고 있습니다. 그 결과, 미국을 좀 더 관대한 방향으로 이끌어가는데 일조했던 진보적 언론매체들이 이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로 전환할 수밖에 없게 되었죠. 그 결과 부유한 진보주의자들을 분노하게 하고, 자신들과 의견을 같이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서는 등을 돌리는 미디어가 되었죠. 게다가, 이러한 많은 견해들이 점차 더욱더 극단적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좌파 성향이란 한때는 인종차별적이었던 국가가 보다 수용적으로 변하게 만들었던 가치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마우스 클릭 수에만 집착하는 좌파 언론들은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박사의 ‘피부색이 문제가 되지 않는 평등한 국가라는 비전’에 대해 역설적이게도 인종차별적이라는 비난을 표출하며,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을 위한 도움과 특별한 조치 등을 깎아내리고 비방하는 놀라운 행보를 보이며, 동시에 무기력해져 가는 모습도 보이고 있죠.
또 다른 예시를 들어볼까요? 많은 이들이 사회적으로 동성 결혼의 장점과 도덕성을 인정하고 있기에, 기존 미디어들은 어린이 성전환 수술을 조명하며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악질적인 사람으로 비추곤 하죠. 이때 대중들이 좌파의 의견 쪽으로 휘청이면, 좌파 진영은 오히려 선수를 치며 성별이나 인종 이데올로기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을 편협한 사람으로만 몰아붙이고, 그들의 발언권을 일절 차단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런 경향은 우파 측에서도 당연히 존재합니다. 낙태나 성전환에 관한 문제에 대한 우파의 입장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루밍족”으로 낙인찍어버리거나 아기 살인범이라고 비추곤 하죠. 디지털 트래픽만을 쫓는 양쪽 미디어 매체는 돈을 벌고, 한쪽으로 쏠린 신념을 가진 사람들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공공 담론의 거대한 중간 합의 지대이자 완충지대이기를 이미 포기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다양한 미디어 모델에 의해 사람들이 처하게 되는 양극화 문제는 분명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 동시에 미디어를 개인의 이기적인 목적으로 악용하며 서서히 우리를 분열시키고 있는 이들에게 대응하는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우리는 앞으로의 미디어에 대해 반응해야 할 필요가 있죠. 우리 의견과 같지 않은 사람들을 미워하고 배척하고 싶어 하는 유혹 따위는 과감히 이겨내 버리고, 공감과 열린 마음을 바탕으로 토론의 과정을 거쳐 그들을 설득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진정한 도전이란, 우리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의 권리까지도 함께 보호하는 것이죠.
오늘날 인종, 성별 또는 언론의 자유에 있어 오락가락 명확하지 않은 태도를 취하는 것만이 우리의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유일한 요소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언론과 언론을 통한 생성된 여러 메시지들이 상호 의견을 교류하고 납득시키기 위한 격렬한 과정인 토론을 중단시키고, 그런 애매모호한 태도가 끝끝내 허용되게 만드는 것은 문제죠. 이러한 문제는 우리가 현재 논쟁하고 있는 그 주변 변두리의 이야기보다도, 우리가 모두 동의하고 있는 어마어마한 양의 문제들에 집중할 필요성과, 앞으로도 토론해야 할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작가 소개
아티클 저자 사르곤 씨는(Ungar-Sargon) 뉴스위크의 부 편집장이며 동시에 ‘언택트 북스’에서 출판한 <나쁜 뉴스들: 깨어난 미디어가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방법>이라는 책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Trasnlated by 모닝 오너 희석, 영진, 근영, 지수, 승하, 수정
<The Monocle Companion> 보러가기
이 아티클은 첫번째 Morning Hurdling, ‘Monocle Translation’의 결과물로, <The Monocle Companion> 속 일부 컨텐츠를 모더레이터 희석 님과 모닝 오너 다섯 분이 함께 번역했습니다.
Article #42: The Future of Media : 미디어의 미래
많은 문화적 논의들이 비난과 모욕이라는 이름으로 점차 그 의미가 퇴색되고 변질되고 있기에, 지난 수년간 우리 사회가 성취해 왔던 많은 것들을 쉽게 잊고는 합니다. 그 말은 곧, 인간 고유의 ‘주장하는 능력’ 자체를 위협받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이런 분열은 없었다 싶을 정도로 사람들은 미국이 분열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들은 마치 미국이 내전 직전의 상황을 겪고 있는 것처럼 말하기도 하죠.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미국 내의 극단적 정치 상황이 바로, 우리 사회 구조를 위협하는 가장 큰 문제이자 중대한 이슈라고 말해왔어요. 그러나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사실 몇 세기동안 우리 의견을 양분해 왔던 중대한 몇몇 논쟁거리는 이미 대체로 어느 정도 마무리 되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소수자들도 동등한 권리를 갖는 것이 맞는 것일까요?”와 “우리의 실수투성이 역사를 아이들에게 가르쳐야만 할까요?”, 그리고 “사람들은 누구든 자신이 선택한 이와 자유롭게 결혼할 권리가 있나요?”나 “우리가 각자의 존엄성에 대한 권리를 공유하고 주장하며 살아야 하나요?”와 같은 질문에 다수가 ‘당연한 일이다’라고 동의합니다. 그렇게 대체로 역사는 옳은 쪽이 이겨왔고, 이는 정치적으로 특히 좌파 측에게 주로 일어났던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좌파는 어떻게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이러한 여론 혁명에서 승리를 쟁취해 올 수 있었을까요? 이에 대해서는 바로, 레거시 미디어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후 미국의 저널리즘은 미국 사회의 광범위한 영역을 다루고 이를 충족시키기 위한 다양한 보도를 실천하기 위해 출발하였습니다. 그 결과 대체로 평균적인 미국인보다도 더 진보주의적 사고를 실천해 왔던 대다수의 언론인들은 결국, 사람들을 저널리즘 속에 자연스럽게 유입시키는 일에 관여할 수밖에 없었죠. 뉴스와 신문을 판매하는 사업 모델은 결국 당의 이념과 정치관 같은 것을 뛰어넘어, 가능한 한 가장 많은 청자와 구독자를 확보하는 것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고, 그래서 당시의 진보주의자들은 청중과 독자들을 참여시키고 설득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동시에 그들은 자신에게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 혹은 심지어 정말로 비도덕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그냥 무시하거나 악마처럼 묘사할 수는 없었죠.
20세기 내내 저널리즘은 반대하는 이들에 대한 우려와 그로부터 비롯되는 불편함을 매듭지어야 했습니다. 그 결과 좀 더 관대한 미국이라는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고통스러울 정도로 느린 방법으로 미국 전역 신문 게시판, 논평 기사 그리고 방송 등을 택했고, 이를 통해 그러한 문제들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표면적으로는 성공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은 한때 급진적이고 좌파적인 견해로만 여겨졌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거의 찾아보기 어려울 거예요. 미국 건국 이래 만들어졌던 “모든 미국인의 평등을 보장한다”는 법과 가치에 모두가 동의하는 것처럼 말이죠. 이를 뒷받침해 주는 통계에 대해 살펴보자면, 1991년까지만 해도 (동부의 54%에 비해) 남부에서는 서로 다른 인종 간 결혼에 대한 찬성률이 33% 정도에 불과했죠. 그러나 오늘날 남쪽과 동쪽 사이에는 이러한 차이가 없습니다. 각각 93%와 94%의 찬성률을 확인할 수 있죠. 양극화에 대한 끝없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많은 경우 우리가 대체로 동의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물론, 여전히 논쟁은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대체로 “우리는 태아를 언제부터 생명으로 판단해야 하는지, 한 시민이 얼마나 많은 총기를 소유할 수 있는지, 정부가 우리의 세금을 무엇에, 어떤 문제에 사용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서는 대체로 의견이 갈리는 편이긴 합니다. 하지만 이런 것은 모두 건강한 민주주의체제 안에서 사회에 참여하여 주장하고 토론할 수 있는 종류의 논쟁임은 분명합니다. 이러한 ‘토론 그 자체’를 보장하는 것은 좌파 역시 지지하는 태도였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변화가 있었고, 현재 좌파는 더 이상 그러한 토론에 가치를 두지 않는 것처럼 보이곤 합니다. 미국의 여론이 ‘좌파의 도덕성’으로 눈길을 돌리며, 좌파는 계속 흔들리기 시작했고, 한때 지지했던 많은 입장과 가치를 포기하고 있죠.
오늘날 우리는 20세기 내내 대중 매체를 통해 상호 간 관대한 합의의 과정을 마련하고, 또 대중들을 부드럽게 설득하는 과정이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과거 좌파진영이 열심히 설파했던 ‘관용’이라는 가치가 어느새 반대 의견을 바라보는 더 확고한 편협함 같은 태도로 대체되어 버렸죠. 오늘날 좌파는 그들이 한때 싸웠던 것의 많은 부분 -특히, 민주주의, 토론과 합의, 조율 등의 가치- 에 대해 점차 혐오적이고 편협한 태도로 바뀌었습니다.
미디어는 이런 상황에서 다시 한번, 중대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죠. 광고와 유통을 통해 돈을 벌었던 과거 인쇄 매체와는 달리 디지털 미디어는 참여와 구독으로 기능하며, 미국 정치 중산층의 광범위한 의견을 담아내고 이를 포용하는 것 대신 극단적인 방향으로 여론을 이끌어내 이를 바탕으로 수익구조를 만들고 운영되고 있습니다. 그 결과, 미국을 좀 더 관대한 방향으로 이끌어가는데 일조했던 진보적 언론매체들이 이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로 전환할 수밖에 없게 되었죠. 그 결과 부유한 진보주의자들을 분노하게 하고, 자신들과 의견을 같이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서는 등을 돌리는 미디어가 되었죠. 게다가, 이러한 많은 견해들이 점차 더욱더 극단적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좌파 성향이란 한때는 인종차별적이었던 국가가 보다 수용적으로 변하게 만들었던 가치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마우스 클릭 수에만 집착하는 좌파 언론들은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박사의 ‘피부색이 문제가 되지 않는 평등한 국가라는 비전’에 대해 역설적이게도 인종차별적이라는 비난을 표출하며,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을 위한 도움과 특별한 조치 등을 깎아내리고 비방하는 놀라운 행보를 보이며, 동시에 무기력해져 가는 모습도 보이고 있죠.
또 다른 예시를 들어볼까요? 많은 이들이 사회적으로 동성 결혼의 장점과 도덕성을 인정하고 있기에, 기존 미디어들은 어린이 성전환 수술을 조명하며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악질적인 사람으로 비추곤 하죠. 이때 대중들이 좌파의 의견 쪽으로 휘청이면, 좌파 진영은 오히려 선수를 치며 성별이나 인종 이데올로기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을 편협한 사람으로만 몰아붙이고, 그들의 발언권을 일절 차단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런 경향은 우파 측에서도 당연히 존재합니다. 낙태나 성전환에 관한 문제에 대한 우파의 입장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루밍족”으로 낙인찍어버리거나 아기 살인범이라고 비추곤 하죠. 디지털 트래픽만을 쫓는 양쪽 미디어 매체는 돈을 벌고, 한쪽으로 쏠린 신념을 가진 사람들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공공 담론의 거대한 중간 합의 지대이자 완충지대이기를 이미 포기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다양한 미디어 모델에 의해 사람들이 처하게 되는 양극화 문제는 분명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 동시에 미디어를 개인의 이기적인 목적으로 악용하며 서서히 우리를 분열시키고 있는 이들에게 대응하는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우리는 앞으로의 미디어에 대해 반응해야 할 필요가 있죠. 우리 의견과 같지 않은 사람들을 미워하고 배척하고 싶어 하는 유혹 따위는 과감히 이겨내 버리고, 공감과 열린 마음을 바탕으로 토론의 과정을 거쳐 그들을 설득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진정한 도전이란, 우리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의 권리까지도 함께 보호하는 것이죠.
오늘날 인종, 성별 또는 언론의 자유에 있어 오락가락 명확하지 않은 태도를 취하는 것만이 우리의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유일한 요소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언론과 언론을 통한 생성된 여러 메시지들이 상호 의견을 교류하고 납득시키기 위한 격렬한 과정인 토론을 중단시키고, 그런 애매모호한 태도가 끝끝내 허용되게 만드는 것은 문제죠. 이러한 문제는 우리가 현재 논쟁하고 있는 그 주변 변두리의 이야기보다도, 우리가 모두 동의하고 있는 어마어마한 양의 문제들에 집중할 필요성과, 앞으로도 토론해야 할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작가 소개
아티클 저자 사르곤 씨는(Ungar-Sargon) 뉴스위크의 부 편집장이며 동시에 ‘언택트 북스’에서 출판한 <나쁜 뉴스들: 깨어난 미디어가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방법>이라는 책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Trasnlated by 모닝 오너 희석, 영진, 근영, 지수, 승하,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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