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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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한 잡지와 긴 인터뷰를 했는데 나중에 인터뷰기사의 제목이 <성실하고 성실한 소설가, 임경선>으로 뽑힌 것을 보고 잠시 생각에 골똘히 빠진 적이 있었다. 전업작가로 살면서 주변으로부터 적지 않게 비슷한 말을 들어왔지만 나를 정의하는 가장 명징한 특징으로 ‘성실함’을 못박아버리니 새삼스러웠던 것이다. 


성실함에 대한 짐작에는 아마 이런 해석들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오랜 회사원 시절을 보내고 늦깎이로 작가가 된 탓에 ‘회사에 출근하듯이’ 매일 아침 카페로 나가 글을 썼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책이 꾸준히 출간되었다. 책이 계속 나오니 어쩔 수 없이 독자들도 늘어갔다. 하물며 코로나가 시작되고 실내 운동이 어려워지자 의도치 않게 밖으로 나가 달리기를 시작했다. 코로나가 끝나면 달리기도 바로 그만 두려고 했는데 코로나가 끝나지 않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삼 년째 ‘런너’로 살고 있어 ‘성실한’이미지가 괜히 더 강화된 것 같기도 하다. 혹은 성실이란 타고난 재능이나 천재성이 구비되어 있지 못한 보통의 예술가가 유일하게 취할 수 있는 방편이라 단순히 ‘장려’의 의미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겉으로 보이는 성실함의 징표들과는 별개로, 성실함의 조금 다른 속사정에 대해 말하고 싶다. 흔히 주변에서 누가 참 열심히 성실하게 산다 싶으면, 우리는 그 사람을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향해 치열하게 달려가는 파이팅 넘치는 사람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나는 진.짜.로.성.실.한. 사람이란 오히려 긍정 에너지의 화신이기보다 인생의 근본적 공허를 깨달아 버린 비관적 현실주의자라고 짐작한다. 그들에게 삶이란 한치 앞을 모르는 불확실함이자 언제라도 타의에 의해 무너져 내릴 수 있는 불안정한 것. 하지만 삶이란 애초부터 지는 싸움이기 때문에 도리어 놔 버리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들이다. 계속 비관하고 우울해 할 수 만은 없기에 ‘그렇다면 이 제한된 상황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를 차분히 가늠하고 실천한다.  


그래서 어떤 이들에겐 성실함은 ‘성취’가 아니라 차라리 ‘견딤’에 가까운 개념이다. 가파르게 변해가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세상의 흐름에서 소외되거나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남다른 열정으로 숨가쁘게 적응완료하기보다 조금 늦되더라도 시간의 힘을 믿어가며 제대로 나에게 맞는 한 발자국을 신중하게 내딛는다. 휘말리거나 휘둘리지 않고 자신이 있어야 할 장소에 서 있기 위해 두 다리로 꿋꿋이 주변의 저항을 견뎌 내기도 한다. 누군가는 변화를 따라잡지 못한 자의 정신승리라고 할 지도 모르지만 정말이지 이 문제에 대해 나는 꽤 오랜 시간 생각을 거듭했다. 단적으로 내가 속한 '책의 세계'야말로 어쩌면 현세에서 가장 뒤처진 장소이기 때문이다. 


성실함에 물리적 한계라는 게 있다면 그것은 ‘내가 좋아하고 나에게 맞는 일’에 우선적으로 쓰여야 한다. 남들이 하라고 등을 떠미는 것이나, 모두가 몰려가는 곳으로 허겁지겁 달려가기 위해 쓰일 게 아니라. 다만 하나 분명히 짚고 넘어갈 건 있다. ‘내가 좋아하고 나에게 맞는 일’이 무엇인지는 그간의 누적된 경험치가 증명해 주어야 한다. 다시 말해 거저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지난 십 칠 년간 스무 권이 넘는 책들을 꾸준히 써왔다. 뭐든 쉽게 질려 하는 내가 그토록 오랜 기간 쓰는 일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분명 신뢰할 만한 검증이다. 그 직관이 확실하다면, 환경적 요소들이 불안정하고 불확실 하더라도 어떻게든 밀려오는 파도와 맞서며, 고통을 자발적으로 감당할 수 있다. 


지나고 보면 어렵지 않던 시절이 또 언제 있었던가. 때로는 주변의 소음을 차단하고 나에게 정말 중요한 일에 차분히 시간을 들이는 것, 그것이 가져올 결과를 믿으며 스스로를 부단히 단련시키는 것 – 다시 말해 나의 방식대로 삶을 이끌어 가겠다는 의지, 그것이 적어도 나에게는 ‘성실함’의 유일한 의미다. 


글/임경선(작가) 

*이 글은 임경선 작가의 매거진 Achim 기고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