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아티클은 ACC Morning Hurdling의 첫 번째 프로그램인 ‘Monocle Translation Hurdling’의 결과물입니다.
<The Monocle Companion> 속 일부 컨텐츠를 호스트 희석 님과 모닝 오너 다섯 분이 함께 번역했습니다.
Article #26: The age of disenlightenment : 깨달음의 시대
점점 더 무언가로부터 동떨어지는 것을 멈추기 위해 우리는 서로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을 찾고, 서로에게 경청해야 하며, 현실 감각을 나누고 이를 다시 다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분 모두가 동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17세기와 18세기 유럽과 함께 발전하고 있던 북미지역은 한 사회를 형성하는데 필요한 이성적 사고와 이상, 그리고 근본에 대한 정의와 탐구를 철학자, 정치인, 그리고 과학자들(이를테면 아이작 뉴턴이나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와 같은 대가)의 철학에 기반을 두었던 시기로, ‘깨달음의 시대’로도 불리고는 합니다. 이 상황에 적합한 표현은, 임마누엘 칸트의 “사페레 아우디 sapere aude”, 즉 “과감히 알려고 하라” 일 테죠.
대부분은 진실과 본질을 찾기 위해 양육되고, 교육받고, 종종 엄격하게 훈련받았습니다. 적어도 우리 생각에는 말이죠. 이러한 진실과 본질은 우리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미끄럽고 터득하기 어려운 것일 지도 모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이는 이중적으로 제시되고는 합니다. 우리는 진실 혹은 거짓, 이 두 가지로 대답할 수 있습니다. 유년기의 여러분이 어떤 긴 이야기를 말할 때, 부모님은 “진실을 말해라”라고 이야기하거나 혹은 그 이야기의 결말을 직접 마주할 수 있도록 했던 것을 기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소설과 비소설은 도서관에서 명확히 분리되어 있으며, 서로 절대 섞일 만한 틈도 주지 않도록 각각 고유한 섹션으로 구분되어 있죠. 그러나 이러한 작고 깔끔한 공간에는 현실의 엉망진창 뒤죽박죽인 모습을 절대 그대로 투영해 나타내지 않습니다. 대신, 감정과 인식 그리고 해석의 단계로 구성되어 있죠. “진실” 그리고 “거짓”과 같은 흑백논리는 우리 세상에 절대 들어맞지 않습니다. 존재하는 한, 여러분은 회색지대에 살고 있습니다.
진실을 평가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이는 적어도 공통의 목표였습니다. 인류는 난해하고 어려운 질문에 답하며 놀라운 발견을 하기 위해 무한한 호기심의 능력을 활용하여 지식을 추구할 때, 비로소 그들 최고의 상태에 도달하게 됩니다. 절대적인 진리에 닿지 못하는 곳에서도 우리는 신화를 창조하고 이를 전승해 왔습니다. 우리는 착시현상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우리의 차이점에 대해 논쟁하기도 하지만, 전통적으로 증거 기반의 사실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모였습니다. 적어도, 세상을 바라보는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했습니다. 오늘날, 여러분과 여러분 자신의 현실 인식을 신뢰하는 방법 사이의 암묵적이고 협력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 어렵습니다. 여러분이 사실로 인지하는 것과 더 넓은 세계가 동의하는 현실 사이에서의 격차는 진실에 대한 불안정함을 초래하죠. 새롭게 설계되는 현실과 우리의 주체성에서 점점 더 적대적인 관계들이 확산되면서 우리는 서로로부터 더 멀어지고, 가장 파괴적인 결과로는 공유되는 일련의 진실들로부터 더 멀어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요? 기술의 급격한 출현이 이에 대한 간단한 대답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좋든 나쁘든, 사회의 여러 문제 상황을 헤쳐나가기 위한 우리의 능력은 이제 스마트폰과 노트북에 필연적으로 묶여 있죠. 전 세계적으로 인터넷이 중단된다면 전례 없는 수준의 좌절, 정체, 그리고 혼란이 발생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미 더 이상 과장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안타깝게도, 공유되는 현실의 부족함을 기술의 발전 탓으로 돌리는 것은 근시안적인 관점일지도 모릅니다. 인공지능 기술은 우리를 골탕 먹이기 위해 개발된 무기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그리는 미래를 지탱하고 우리의 삶을 꾸려가는 데 도움을 주는 도구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오로지 우리가 사용하는 도구와 기술의 잘못은 아닙니다. 마치 목수의 역할이 나무를 다루는 것과 비슷한 셈이죠. 공공실측 자료의 부족은 근본적으로 우리 인간의 잘못입니다. 팬데믹을 겪고 사회적인 접촉이 줄어들며 온라인 커뮤니티를 찾는 선택지가 늘어나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면 만남이 줄어드는 상황을 갑작스레 경험하게 되었죠. 많은 사람들이 원격으로 업무를 처리하며, 동료 그리고 친구가 될 수도 있는 사람들과의 의미 있는 소통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늦은 밤 우리가 외로움을 느끼면, 핸드폰을 켜고 비슷한 상실의 감정을 느끼는 사람들을 쉽게 찾을 수 있죠.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사람과 주제 그리고 문제들을 분류하는 것이 더 쉬워질수록, 안전지대에서 스스로를 벗어나도록 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집니다. 특히 인터넷이 무한한 안전지대를 만들어줬던 어린 친구들한테는 더욱 그렇죠.
만약 모두가 안전지대 속에만 머무르려고 한다면, 그 결과는 매우 끔찍해질 것입니다. 마치 끝없이 메아리가 울려 퍼지는 밀실 같은 1) 에코 체임버 속에 스스로를 가두게 될 뿐만 아니라, 함께 공유하는 현실에 대한 각자의 끊임없는 탐색 역시 거의 불가능해질 것입니다. 현재의 우리는 무언가가 왜곡되었거나 보통의 범주에서 벗어났다고 인식하곤 하지만, 그것에 대해 무엇을 해야 할지 파악하기는 어려운, 꼭 유령의 집에 있는 거울 미로와 같은 환경에서 놓여있는 셈이죠. 그렇다면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할까요? 왜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는 걸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가 원래 알고 있었던 것들을 되찾을 수 있도록, 그곳으로 돌아가는 길을 알아낼 수 있을까요? 처음부터 우리가 ‘알고’ 있다고 아는 것들이 과연 존재하는 것이었을까요? 우리가 이전에 보던 대로 보지 못하는 것에 상실감을 느끼며 또 그 감정에 압도되면, 전 세계 사람들은 가상을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우리가 그것이 진짜가 아니라고 느낄 때마저도 말이죠. 이렇게 점점 더 ‘거짓’을 마치 ‘사실’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현상에 대해 자연스럽게 합의하고 있고, 또 그러한 세계 안에서 작동하고 기능하게 되는 것이죠.
뒤틀린 현실은 온전히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사실, 이미 그러한 현실은 사회적 질서를 따르려는 인간의 욕망을 반영하며 우리의 삶으로 서서히 접근해 왔답니다. 수 세기 동안, 각 정부와 세계 정상들은 현상 유지를 방해하는 변화를 막기 위해 많은 관행을 수용해 왔습니다. 그 결과 인종 간 평등과 양성평등 그리고 다른 본질적인 인권을 지키기 위한 운동들이 최근에서야 일어났고, 여전히 한창 진행되고 있습니다. 권력자들은 세상을 운영하는 그들의 방식을 정당화하기 위해 오랫동안 의도적으로 소외되어 왔던 계층을 외면해 왔어요. 오늘날에는 기술이 발전해 우리 역시도 그러한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기도 합니다. 고도의 딥페이크(인공지능을 활용한 이미지 조작 기술)로 만들어진 트윗 하나로도 우리도 금세 진실 같은 거짓을 만들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대체된 진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 삶 전반에 퍼져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쉽게 바꾸기까지 합니다. 우리는 마치 놀이공원 도깨비 집의 거울에 비친 이미지에 익숙해지듯이, 알게 모르게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건 아마, 끔찍하게도, “무지의 시대”겠지요.
인공 지능을 활용해 데이터를 모으고 상황을 분석하는 우리 능력은 매우 합리적이고 데이터 중심적인 인류의 탄생으로 이어져야 했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덜 문명적이고 덜 깨어있으며 매우 위험한 상태로 회귀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삶이 약한 버전의 파리지옥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최상의 진실을 만들기 위해 경쟁하고 있습니다. “최상”이라는 단어에 대한 정의마저 흔들리고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 속에서 말이죠. 제 생각에 가장 끔찍한 것은, 이기적인 마음으로 가득 찬 개인들이 가장 많은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나는 나만의 작은 세계에 살고 있지만, 적어도 그곳에서 나는 행복하다"라는 문장에 새로운 맥락에서 훨씬 더 어두운 의미를 부여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러한 고립이 불가피한 현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바로 문제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단계는 확실히 더 도전적이어야 합니다. 콘텐츠 제작자를 위한 약간의 팁이 있다면, 그들에게는 모든 개인의 선호도를 충족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들이 이미 부족하지 않다는 점이죠. 기업이든, 통신사든, 개인 사용자의 출판물이든, 그들이 직면할 막다른 상황들이 결국 콘텐츠 제작자에게는 이익이 될 것입니다. 클릭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 많이 드러나게 되고,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껍질 속으로 더욱더 후퇴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결국 모든 변화는 우리 스스로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건 무모할 수도 있지만 강력한 제안이죠.
개인으로서, 우리 모두는 해야 할 각자의 역할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자신을 좀 더 단순하고 명료하게 하기 위해서 스스로 끊임없이 도전해야 하죠. 만약 우리가 우리 내면으로 이끄는 각자 마음속의 탐험가를 따른다면, 우리는 스스로의 새로운 원천을 찾아내고 또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단순하게는 우리 마음을 열어둠으로써 스스로의 세계 그 너머를 모험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한 여정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것을 접하고 새로운 관계들을 맺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결국 다른 사람들의 관점과 가치를 외면하고 무시하는 태도는 살아남기 어려워질 것이죠. 또한 각자 자신의 참호 속에서 서로에게 소리치지 않을 때가 비로소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기 훨씬 수월할 것이라는 사실 또한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자기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정치권과 사회를 벗어나게 되면, 예상치 못한 곳에서 공통점을 찾고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우리의 동료 탐험가들과 함께라면 새롭고 보편화된, 객관적인 진리와 본질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죠. 분명 그 과정은 길고 힘들 테지만 적어도 우리는 혼자가 아닐 테니까요!
참고
1) 에코 체임버: 같은 세상을 바라봄에도 불구하고, 틀에 갇힌 사고와 관점을 가진 사람들을 '에코체임버(Echo Chamber)'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곤 합니다. 에코체임버는 원래 방송 등에서 인공적으로 메아리(에코)를 만드는 방인 ‘반향실’을 뜻한다고 합니다.
+ 함께 읽어보면 좋은 <‘주간조선 [Cover Story] 알고리즘이 두 쪽낸 사회... 통하지도, 통할 마음도 없다’> 기사를 함께 첨부합니다.
작가 소개
이번 아티클의 경우 두 저자가 함께 참여한 특별한 아티클로, 아티클의 저자인 매크리스탈(Stanley A McChrystal)과 채핀(Ellen Chapin) 은 각각 은퇴한 미군 장성이자 활발한 저자, 현역에서 미국 정치와 국제적 관계에 대해 연구하는 스탠포드 대학의 박사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Trasnlated by 모닝 오너 희석, 영진, 근영, 지수, 승하, 수정
<The Monocle Companion> 보러가기
이 아티클은 ACC Morning Hurdling의 첫 번째 프로그램인 ‘Monocle Translation Hurdling’의 결과물입니다.
<The Monocle Companion> 속 일부 컨텐츠를 호스트 희석 님과 모닝 오너 다섯 분이 함께 번역했습니다.
Article #26: The age of disenlightenment : 깨달음의 시대
점점 더 무언가로부터 동떨어지는 것을 멈추기 위해 우리는 서로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을 찾고, 서로에게 경청해야 하며, 현실 감각을 나누고 이를 다시 다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분 모두가 동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17세기와 18세기 유럽과 함께 발전하고 있던 북미지역은 한 사회를 형성하는데 필요한 이성적 사고와 이상, 그리고 근본에 대한 정의와 탐구를 철학자, 정치인, 그리고 과학자들(이를테면 아이작 뉴턴이나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와 같은 대가)의 철학에 기반을 두었던 시기로, ‘깨달음의 시대’로도 불리고는 합니다. 이 상황에 적합한 표현은, 임마누엘 칸트의 “사페레 아우디 sapere aude”, 즉 “과감히 알려고 하라” 일 테죠.
대부분은 진실과 본질을 찾기 위해 양육되고, 교육받고, 종종 엄격하게 훈련받았습니다. 적어도 우리 생각에는 말이죠. 이러한 진실과 본질은 우리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미끄럽고 터득하기 어려운 것일 지도 모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이는 이중적으로 제시되고는 합니다. 우리는 진실 혹은 거짓, 이 두 가지로 대답할 수 있습니다. 유년기의 여러분이 어떤 긴 이야기를 말할 때, 부모님은 “진실을 말해라”라고 이야기하거나 혹은 그 이야기의 결말을 직접 마주할 수 있도록 했던 것을 기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소설과 비소설은 도서관에서 명확히 분리되어 있으며, 서로 절대 섞일 만한 틈도 주지 않도록 각각 고유한 섹션으로 구분되어 있죠. 그러나 이러한 작고 깔끔한 공간에는 현실의 엉망진창 뒤죽박죽인 모습을 절대 그대로 투영해 나타내지 않습니다. 대신, 감정과 인식 그리고 해석의 단계로 구성되어 있죠. “진실” 그리고 “거짓”과 같은 흑백논리는 우리 세상에 절대 들어맞지 않습니다. 존재하는 한, 여러분은 회색지대에 살고 있습니다.
진실을 평가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이는 적어도 공통의 목표였습니다. 인류는 난해하고 어려운 질문에 답하며 놀라운 발견을 하기 위해 무한한 호기심의 능력을 활용하여 지식을 추구할 때, 비로소 그들 최고의 상태에 도달하게 됩니다. 절대적인 진리에 닿지 못하는 곳에서도 우리는 신화를 창조하고 이를 전승해 왔습니다. 우리는 착시현상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우리의 차이점에 대해 논쟁하기도 하지만, 전통적으로 증거 기반의 사실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모였습니다. 적어도, 세상을 바라보는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했습니다. 오늘날, 여러분과 여러분 자신의 현실 인식을 신뢰하는 방법 사이의 암묵적이고 협력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 어렵습니다. 여러분이 사실로 인지하는 것과 더 넓은 세계가 동의하는 현실 사이에서의 격차는 진실에 대한 불안정함을 초래하죠. 새롭게 설계되는 현실과 우리의 주체성에서 점점 더 적대적인 관계들이 확산되면서 우리는 서로로부터 더 멀어지고, 가장 파괴적인 결과로는 공유되는 일련의 진실들로부터 더 멀어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요? 기술의 급격한 출현이 이에 대한 간단한 대답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좋든 나쁘든, 사회의 여러 문제 상황을 헤쳐나가기 위한 우리의 능력은 이제 스마트폰과 노트북에 필연적으로 묶여 있죠. 전 세계적으로 인터넷이 중단된다면 전례 없는 수준의 좌절, 정체, 그리고 혼란이 발생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미 더 이상 과장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안타깝게도, 공유되는 현실의 부족함을 기술의 발전 탓으로 돌리는 것은 근시안적인 관점일지도 모릅니다. 인공지능 기술은 우리를 골탕 먹이기 위해 개발된 무기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그리는 미래를 지탱하고 우리의 삶을 꾸려가는 데 도움을 주는 도구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오로지 우리가 사용하는 도구와 기술의 잘못은 아닙니다. 마치 목수의 역할이 나무를 다루는 것과 비슷한 셈이죠. 공공실측 자료의 부족은 근본적으로 우리 인간의 잘못입니다. 팬데믹을 겪고 사회적인 접촉이 줄어들며 온라인 커뮤니티를 찾는 선택지가 늘어나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면 만남이 줄어드는 상황을 갑작스레 경험하게 되었죠. 많은 사람들이 원격으로 업무를 처리하며, 동료 그리고 친구가 될 수도 있는 사람들과의 의미 있는 소통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늦은 밤 우리가 외로움을 느끼면, 핸드폰을 켜고 비슷한 상실의 감정을 느끼는 사람들을 쉽게 찾을 수 있죠.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사람과 주제 그리고 문제들을 분류하는 것이 더 쉬워질수록, 안전지대에서 스스로를 벗어나도록 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집니다. 특히 인터넷이 무한한 안전지대를 만들어줬던 어린 친구들한테는 더욱 그렇죠.
만약 모두가 안전지대 속에만 머무르려고 한다면, 그 결과는 매우 끔찍해질 것입니다. 마치 끝없이 메아리가 울려 퍼지는 밀실 같은 1) 에코 체임버 속에 스스로를 가두게 될 뿐만 아니라, 함께 공유하는 현실에 대한 각자의 끊임없는 탐색 역시 거의 불가능해질 것입니다. 현재의 우리는 무언가가 왜곡되었거나 보통의 범주에서 벗어났다고 인식하곤 하지만, 그것에 대해 무엇을 해야 할지 파악하기는 어려운, 꼭 유령의 집에 있는 거울 미로와 같은 환경에서 놓여있는 셈이죠. 그렇다면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할까요? 왜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는 걸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가 원래 알고 있었던 것들을 되찾을 수 있도록, 그곳으로 돌아가는 길을 알아낼 수 있을까요? 처음부터 우리가 ‘알고’ 있다고 아는 것들이 과연 존재하는 것이었을까요? 우리가 이전에 보던 대로 보지 못하는 것에 상실감을 느끼며 또 그 감정에 압도되면, 전 세계 사람들은 가상을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우리가 그것이 진짜가 아니라고 느낄 때마저도 말이죠. 이렇게 점점 더 ‘거짓’을 마치 ‘사실’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현상에 대해 자연스럽게 합의하고 있고, 또 그러한 세계 안에서 작동하고 기능하게 되는 것이죠.
뒤틀린 현실은 온전히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사실, 이미 그러한 현실은 사회적 질서를 따르려는 인간의 욕망을 반영하며 우리의 삶으로 서서히 접근해 왔답니다. 수 세기 동안, 각 정부와 세계 정상들은 현상 유지를 방해하는 변화를 막기 위해 많은 관행을 수용해 왔습니다. 그 결과 인종 간 평등과 양성평등 그리고 다른 본질적인 인권을 지키기 위한 운동들이 최근에서야 일어났고, 여전히 한창 진행되고 있습니다. 권력자들은 세상을 운영하는 그들의 방식을 정당화하기 위해 오랫동안 의도적으로 소외되어 왔던 계층을 외면해 왔어요. 오늘날에는 기술이 발전해 우리 역시도 그러한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기도 합니다. 고도의 딥페이크(인공지능을 활용한 이미지 조작 기술)로 만들어진 트윗 하나로도 우리도 금세 진실 같은 거짓을 만들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대체된 진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 삶 전반에 퍼져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쉽게 바꾸기까지 합니다. 우리는 마치 놀이공원 도깨비 집의 거울에 비친 이미지에 익숙해지듯이, 알게 모르게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건 아마, 끔찍하게도, “무지의 시대”겠지요.
인공 지능을 활용해 데이터를 모으고 상황을 분석하는 우리 능력은 매우 합리적이고 데이터 중심적인 인류의 탄생으로 이어져야 했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덜 문명적이고 덜 깨어있으며 매우 위험한 상태로 회귀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삶이 약한 버전의 파리지옥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최상의 진실을 만들기 위해 경쟁하고 있습니다. “최상”이라는 단어에 대한 정의마저 흔들리고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 속에서 말이죠. 제 생각에 가장 끔찍한 것은, 이기적인 마음으로 가득 찬 개인들이 가장 많은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나는 나만의 작은 세계에 살고 있지만, 적어도 그곳에서 나는 행복하다"라는 문장에 새로운 맥락에서 훨씬 더 어두운 의미를 부여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러한 고립이 불가피한 현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바로 문제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단계는 확실히 더 도전적이어야 합니다. 콘텐츠 제작자를 위한 약간의 팁이 있다면, 그들에게는 모든 개인의 선호도를 충족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들이 이미 부족하지 않다는 점이죠. 기업이든, 통신사든, 개인 사용자의 출판물이든, 그들이 직면할 막다른 상황들이 결국 콘텐츠 제작자에게는 이익이 될 것입니다. 클릭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 많이 드러나게 되고,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껍질 속으로 더욱더 후퇴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결국 모든 변화는 우리 스스로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건 무모할 수도 있지만 강력한 제안이죠.
개인으로서, 우리 모두는 해야 할 각자의 역할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자신을 좀 더 단순하고 명료하게 하기 위해서 스스로 끊임없이 도전해야 하죠. 만약 우리가 우리 내면으로 이끄는 각자 마음속의 탐험가를 따른다면, 우리는 스스로의 새로운 원천을 찾아내고 또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단순하게는 우리 마음을 열어둠으로써 스스로의 세계 그 너머를 모험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한 여정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것을 접하고 새로운 관계들을 맺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결국 다른 사람들의 관점과 가치를 외면하고 무시하는 태도는 살아남기 어려워질 것이죠. 또한 각자 자신의 참호 속에서 서로에게 소리치지 않을 때가 비로소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기 훨씬 수월할 것이라는 사실 또한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자기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정치권과 사회를 벗어나게 되면, 예상치 못한 곳에서 공통점을 찾고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우리의 동료 탐험가들과 함께라면 새롭고 보편화된, 객관적인 진리와 본질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죠. 분명 그 과정은 길고 힘들 테지만 적어도 우리는 혼자가 아닐 테니까요!
참고
1) 에코 체임버: 같은 세상을 바라봄에도 불구하고, 틀에 갇힌 사고와 관점을 가진 사람들을 '에코체임버(Echo Chamber)'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곤 합니다. 에코체임버는 원래 방송 등에서 인공적으로 메아리(에코)를 만드는 방인 ‘반향실’을 뜻한다고 합니다.
+ 함께 읽어보면 좋은 <‘주간조선 [Cover Story] 알고리즘이 두 쪽낸 사회... 통하지도, 통할 마음도 없다’> 기사를 함께 첨부합니다.
작가 소개
이번 아티클의 경우 두 저자가 함께 참여한 특별한 아티클로, 아티클의 저자인 매크리스탈(Stanley A McChrystal)과 채핀(Ellen Chapin) 은 각각 은퇴한 미군 장성이자 활발한 저자, 현역에서 미국 정치와 국제적 관계에 대해 연구하는 스탠포드 대학의 박사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Trasnlated by 모닝 오너 희석, 영진, 근영, 지수, 승하, 수정
<The Monocle Companion> 보러가기